목록살아가는 이야기/2019년도 이야기 (122)
Days to Remember
2019년 4월 4일 2014년 4월 4일 금요일 저녁 8시 반에 갑자기 대장암 수술을 한 후에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배가 아파서 월요일에 닥터오피스에 갔다가 맹장염인 줄 알고 CT를 찍은 후 집에 오자마자 응급실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황급하게 병원으로 갔었다. 병원으로 가자마자 게실염인줄 알고 염증 가라앉히는 동안 입원을 하고 있다가 아침마다 나의 상태를 체크하던 중국 여의사의 대장암일 수도 있겠다는 판단으로 우여곡절 끝에 금요일 아침에 대장내시경을 하러 들어갔다가 초입에 막혀서 대장암임을 확인하고 당일 저녁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장밖으로까지 튀어나온 7.5cm의 종양, 22cm의 결장, 대장과 맞닿아 있던 맹장까지 절제한 수술 후 의사가 "99.9프로 대장암이다!" 하는데 TV에서 보듯 하..
2019년 3월~~4월 F4 비자(재외동포) 신청서류 접수 만이라도 3월 안에 되어야 하는 숨가쁜 날들이 지나간다. F4 비자를 받기 위한 절차와 함께 교육청에 신고할 서류 등을 준비하는 것으로 꼬박 한 달을 보냈다. 딸은 한국에서, 우리는 미국에서 필요한 모든 일들을 했다. 딸은 양주 출입국 관리 고양출장소에 가서 F4비자 인터뷰를 무사히 마쳤다. 보통은 3년 짜리를 주는데 불법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출입국 관리소 시스템 오류로 인해 생긴 일인데...)이 있어서 일 년짜리 비자를 받았단다. 일단 일 년 짜리 비자를 받은 후 일 년간 아무 일이 없으면 다음 번에 3년 짜리를 준다는 말과 함께 수속하는데 3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며 그때 찾으러 오라고 했단다. 울딸! 속상했다. 처음으로 자기의 속상한 마음을..
2019년 3월~4월 우리 가정에 생긴 딸의 국적상실이라는 응급상황이 생겼을 때 어려움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의 담대함과 침착함과 그일로 인해 온 가족이 뭉쳐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수 있고 하나님이 이 일에 함께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처음 소식을 접하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두려움은 의외로 침착하게 대응해 나가고 그 힘든 과정을 혼자 감당하면서도 단 한 번도 아빠 엄마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딸의 강인한 마음을 느끼고 알게 되면서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빠른 시간 내에 일을 해결하기 위해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비용도 많이 들어간다. 일본 왕복항공료, 비자신청비, 건강검진과 FBI신원조회 등등... 혼자 고생하고 있는 딸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돈이라도 ..
2019년 3월 이미 국적상실이 되었고 국적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우리에겐 불가능한 일이라서 이제는 합법적으로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첫 번째는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재외동포 비자인 F4 비자를 신청해야 하는 일이다. F4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선 합법적으로 들어온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딸은 한국국적이 상실된 상태에서 (전혀 몰랐었다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한국여권으로 한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불법으로 들어온 상태가 되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서류를 준비해서 공항출입국 관리소에 가서 신고를 한 후에 미국여권으로 다른 나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한단다. 벌금을 물어야 하는데 다행히 3월은 자진 출국 기간이라서 자진신고를 하면 벌금이 면제된단다. 당일에 나갔다 ..
2019년 3월~4월 복수국적자인 딸이 한국에 입국한 후에 국적상실이 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뭔가 착오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꼼꼼한 남편이나 잔근심이 많은 나같은 성격에 외국국적 불행사 서약에 사인을 하지 않고 사인을 했다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철석같이 믿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5년 동안을... 철석같이 믿었기에 딸이 요번에 직장을 알아보고 이력서를 내는 과정에서도 몇 번이나 물어봤음에도 '너는 복수국적자가 확실하다' '5년 전에 사인을 했다'고 거듭 말만을 했다니... 그동안(22세 전) 한국 여권을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고 한국의 은행계좌나 주민등록증 만드는데 문제가 없었기에 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었다. 한 번이라도 확인을 해볼걸. 사람이 하는 일에 실수가 있..
2019년 3월 4일 딸이 한국에 도착해서 걸려오는 첫 전화여서 반갑고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며 잘 지내냐, 한국 좋니? 라는 나의 속사포 물음에 딸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서 "엄마 큰일이 생겼어요" 한다. 큰 일? 무슨 일? 주민등록증 주소를 변경하려고 주민센터에 갔는데 국적상실이 되어서 해줄 수 없다고 했단다. 딸은 선천적 복수국적자이다. 우리는 딸이 미국에서 태어났고 태어났을 때 한국의 호적에 등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딸이 선천적 복수국적자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지내다가 19살이 된 2014년도에 한국의 시골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한국 정부 장학생 프로그램인 TaLK에 선발되어서 한국으로 가게 되었을때 태어날 당시에 부모 특히 아버지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면 자동으로 한국 국적도 갖게 되는 복수국적자..
2019년 3월 4일 장성한 딸과 일 년 반 함께 생활하면서 좋은 일도 많았지만 불편한 일도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딸과의 헤어짐은 짠했지만 본인이 원하는 생활을 찾아서 떠나는 것이어서 서로가 기분 좋게 헤어질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딸이 떠나는 날 아침에 주고 간 것들을 보니까 또다시 짠한 마음이 물밀듯이 몰려왔지만 공부하는 딸때문에 조용히 했던 일들 (피아노 치면서 노래하기 등등 ^^)을 맘껏 할 수 있어서 홀가분한 마음도 들었다. 커피좋아하는 아빠를 위한 커피와 내 얼굴에 바르라는 것과 그동안 감사했다는 감사의 편지와 함께 맛있는 것 사 먹으라는 돈까지. 역시 깍듯한 딸이다. 딸이 한국에 잘 도착했고 리쿠르터가 공항으로 픽업나와서 학원에 가서 학원 원장도 만났고 학원이 해준 숙소에 잘..
2019년 3월 1일 ' 고질병인 허리디스크가 있으신 엄마는 나이들어서 키도 많이 줄어들었을뿐 아니라 거동이 불편하셔서 밖에서는 워커를 의지해서 걸으신다. 한국으로 들어가는 딸의 짐이 있어서 뒷트렁크에 워커 실을 자리가 없고 시간이 촉박하다고 느껴서 엄마의 워커를 엄마 아파트 오피스근처 구석에 접어 둔 후에 (청소하는 분에게 남편이 말을 해놓고) 엄마를 양쪽에서 손잡고 식당에 갔다. 당연히 워커가 제자리에 있을줄 알고 점심먹고 두어 시간후에 왔더니 워커가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노인들만 사는 아파트라서 워커가 없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오피스 매니저 말로는 절대로 물건을 그냥 두면 안된단다. 없어진단다. 황당! 남편이 말해놓았다는 청소하는 분은 이미 퇴근했고 오늘은 금요일이고 월요일에나 올..
2019년 3월 1일 딸은 일년 반만에 또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을 좋아하는 딸은 목표로 했던 공부를 마치자마자 한국에 있는 영어학원 일자리를 열심히 알아보았다. 오퍼를 받은 여러곳의 학원중에서 요번에는 일산에 있는 영어학원으로 정해서 오매불망 잊지못하던 한국으로 가는 날이다. 산호세에 사는 가족들과 친지들을 만난 후 가기위해 금요일 밤 11시 반에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남편은 하루 휴가를 냈고 딸을 떠난 보낸 후 늦은 밤에 두 시간 넘는 거리를 운전하고 오는 것보다 산호세에서 하루 자고 여유있게 지내기 위해 호텔을 예약했다. 하루안에 여러 스케쥴을 소화해야 한다. 아침에 집에서 출발해서 외할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은 후에 두시 반엔 산호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대니엘과 만나서 대니엘 할아버지..
2019년 2,3월 2월 첫째 주일은 우리 소그룹이 친교담당이었다. 어김없이 조권사님은 토속적이고도 맛있는 반찬을 준비해 오셔서 친교음식 준비전에 든든하게 먹고 시작했다. 손대접 하기를 즐겨하시는 조권사님덕에 매번 잘 먹는다. 밥도둑이다~~ 요번 친교음식 준비도 참 수월하게 했다. 새로 비즈니스를 하는 집사님 댁에서 떡을 내셔서 우리는 배식만 하고 떡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서 핫덕준비만 하면 되었다. 2월 소그룹모임을 조권사님 가게에서 했다. 와아~~ 분식 총출동의 날이다. 화요 커피브레잌 모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정많은 재원자매는 직장다니며 어린 아기 둘 돌보느라 바쁜 와중에도 정성스러운 것을 준비해왔다. 중간중간 친구들도 만나고 남편과 외식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3월 소그룹 모임..